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848년 혁명 (문단 편집) == 의의 == 비록 혁명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혁명의 결과 보수로의 회귀인 '[[빈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고조되었던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이 48년 혁명 이후 20년도 지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세[* [[융커]]가 권력을 독점한 [[독일 제국]]조차도 정치 권력을 융커들이 독점하였을 뿐이지 경제/사회적으로 보자면 부르주아가 헤게모니를 쥐었다. 비록 명목상이지만 사사건건 총리와 대립한 [[라이히스탁]]이 좋은 예.]가 됐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혁명 그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이루어진 셈. [[에릭 홉스봄]]은 그래서 이 혁명을 놓고 '1848년 혁명의 실패로 유럽이 전환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유럽은 분명히 전환하였다. 단지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체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남하 정책]]이 다시 개시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발생하진 않았지만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폭발한 헝가리 독립 운동 진압에 러시아군 20만 명이 파병되기도 했다. 이때 맞붙던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헝가리 혁명군이 각기 20만 가량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팽팽하게 유지되던 양측의 균형이 와장창 기울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혁명을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직후 불과 5년 뒤 벌어진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뒤통수를 쳤고 양국 관계는 크게 틀어져 버렸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내란 진압을 지원했으니 오스트리아를 우방으로 만들었다는 인식 하에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이 폭발적인 확산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했으며,반대로 단일민족이었던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반도]]가 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둘 모두 프로이센의 제관 거부와 탄압,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민족통일의 움직임이 일단 좌절되었고 통일운동의 주체가 혁명적 부르주아, 지식인 계층에서 '''통일이란 의제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회적, 정치적 자유주의 이념을 수용하는 건 원칙적으로 배격한''' 보수적인 프로이센, 피에몬테 양국의 국가 지도자 계층으로 이동하면서 19세기 초기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의 보편적 이상주의적 면모는 퇴색되고 대신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기원이 되었다. 유럽 열강 중 [[영국]]은 혁명의 여파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지만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당시 종말을 맞은 뒤 결국 '2개의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이 역시 하나의 혁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아일랜드]]까지 포함하면 영국에서도 혁명이 터진 게 맞다. [[https://en.wikipedia.org/wiki/Young_Ireland_rebellion|1848년 청년 아일랜드당의 봉기]]인데 규모야 [[아일랜드 대기근]]이 한창이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마당에 혁명이고 나발이고 할 상황이 도저히 안 됐기 떄문에 전시대 애국당의 봉기나 다음 세기 [[부활절 봉기]]와 비교해도 초라한 규모였지만 이 시기 투옥된 아일랜드인들이 단순한 무력 봉기로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설 수 없는 걸 깨닫고 [[아일랜드어]] 부흥 운동을 필두로 문화계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면서 결국 훗날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닦았으니 나름 중요한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